건축가가 기획자가 될 때- 전시와 건물 사이에서 변주되는 것들

건축 행위의 목표가 지식 생산이라면 건축적 지식이 가장 순수하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는 아이디어가 건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전시 속의 건축적 상황이 아닐까? 1980년 처음 개최된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스트라다 노비시마(Strada Novissima)’라는 거대한 설치 작업에 포함된 건축가 중 한 명인 레온 크리어(Leon Krier, b. 1946)는 “내가 건물을 짓지 않는 이유는 내가 건축가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건물을 짓지 않는 것이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선택임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건축 이론을 책과 전시라는 대안적 매체를 통해 실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답사를 통해 얻는 지식과 전시를 통해 얻는 지식은 동일한 영역 속에 존재하며 표현 수단이 다를 뿐이라고 가정한다면, 건축가의 의도가 최대한 간섭 받지 않고 존중되며 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전시 공간 속에서 건축가의 작업은 더 온전히 구현될 수 있다. 물론 건물의 배경이 되는 지형과 주변 환경의 맥락 속에 품길
때 느낄 수 있는 신체적 또는 현상적 경험은 있다. 그러나 답사를 통해 기억되는 경험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반면, 책이나 그림, 설치 등 전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지식은 한결 집중된 주제 의식과 더불어 시대와 사회적 관념 속에서 편집된 명료하고 생산적인 지식일 수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최근 건축 전시의 수와 규모가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으며, 이를 통한 건축의 지적 세력이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다. 건물보다 전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면서 누가 다음, 어느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선정될 것인가에 대한 루머와
추측들이 건축계의 뉴스거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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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 a captionLa Strada Novissima (Venturi, Krier e Kleihues), 1980 Courtesy Paolo Portoghesi

물론 건축 작업이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상황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파리의 살롱들은 1737년부터 건축가의 그림과 모형 등을 전시했고 런던의 왕립미술원도 1768년부터 건축을 전시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소온 경이 자신의 집을 개방하며 새로운 유형의 건축박물관을 시작한 것도 1837년의 일이다그러나 동시대 미술계의 전시가 단순히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홍보의 경로가 아닌 다양한 조합과 기획을 통한 새로운 의미 생성의 터가 되었 듯이 건축 전시의 목적 또한 조율된 의도를 통한 새로운 건축적 지식의 전달 수단이 되고 있다. 예술의 목적이동시대 사회를 비판하고 미래의 변화를 촉발하는 것이라면, 도시와 환경의 물리적 변화를
이끌고 있는 건축가들은 최전선 현장에서 예술을 실천하는 운동가들이다. 광대하게 건물을 수집하는 콜렉터가 아직 드물고 건축가들의 작업은 아직 아트 시장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 전시에서는 미술 전시에 비해 오히려 더욱 순수하고 현장감이 넘친다. 진정으로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며 대안적 미래를 제시하는 생산적인 지식을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자본의 축적이 팽배하고 기획의 의도가 시장 논리에 흔들리는 미술 전시보다,신중하게 기획되고 신선하게 실현된 건축 전시가 보다 진솔하게 닿는 것도 때문이겠다

전시는 건물에 비해 실현과 경험이 지극히 제한된 시간 안에 마무리되어야 한다. 실재로 전시가 끝난 사후 영향력이 전시들도 많지만,특정 전시를 직접 경험한 자와 경험하지 못한 사이의 간극은 영원히 채워질 없다. 건물의 경험은 다른 환경이나 기후, 시간 등의 조건들과 긴밀한 교신을 통해 이뤄지지만 전시의 경험은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세상에서 상징적으로 분리된 초현셜적, 또는 반현실적 상황 속에서 경험될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어느 공간도 이념적 굴레에서 벗어날 없고 현실로부터의 분리는 전시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있기에 화이트 박스의 괴리감이나 블랙 박스의 폐쇠성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건물은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여건들에 의해 경험의 폭이 무한한 것에 비해 전시의 경험은 대체로 정확한 기획과 조율, 그리고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다. 또한 전시는 , 강연, 세미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기획의 의도와 내용을 글과 이미지로 편집하여 전파할 있고 공간과 지면을 통해 직접적인 발화와 토론의 틀을 제공할 수도 있다. 건물에 비해 전시가 순발력 있게 현실에 접근할 있고 실험적이며 도발적일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하겠다. 이와 같은 전시의 특유성을 존중하는 큐레이팅을 통해 건축적 사고를 새로운 실현 방식을 통해 탐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큐레이터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확장되고 작가의 작업에 개입하는 주도적인 역량이 커지는 것에 대한 반감이 늘어나면서 미술계 내에서는 작가들이 직접 작가큐레이터(artist-curator) 되어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전시 기획을 시도하는 현상이 증가하는 추세다. 반면에 건축 분야의 전시들은 전문 큐레이터가 아직 드물고 학자, 또는 건축가들이 직접 전시를 기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역대 총감독 명단을 보면 학자와 건축가가 거의 번갈아 선정된 것을 있다. 역사, 비평, 이론을 통해 활동하는 학자들이 전시를 때는 전시가 지나치게 학구적이거나 난해하다는 의견이 많고, 건축가가 기획하는 전시는 탐구적 깊이가 얇거나 지나치게 공간적 효과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듣는다.그러나 문제는 학자는 건물을 실현한 경험이 없고 건축가는 학문적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시와 건물을 동등한 건축적 작업의 산물로 간주하고 각각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인지가 선재해야 한다. 큐레이터, 학자,작가 간에 본질적인 작업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기보다 기획자의 태도 속에 전시의 특유성과 건물의 독립성이 동등하게 존중되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큐레이터의 부재보다 큐레이팅의 부족이 문제다

 건축의 역사는 건물의 병렬적 집합이 아닌 건물을 통해 전달되고 정립되는 시대적 관점들과 존재론적 사고들로 이루어진다. 지어진 건물 속에 건축가의 의도를 완전하게 담을 있겠지만,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은 지극히 다원적이고 복잡한 조건들을 충족하며 이루어진다.전시가 주는 자유는 바로 외부적 조건과의 분리에서 비롯된다. 건축적 아이디어가 더욱 정제되어 전달될 있고 사고의 독립성이 보장될 있다. 건물과 전시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건축의 담론에 참여하지만 유효성과 가치는 동등하다. 전시는 이론과 실무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아니다. 전시, 이론, 실무는 제각기 다른 틀과 규율, 그리고 특정한 조건 안에서 함께 건축적 지식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좋은 전시를 경험하면 좋은 건물을 만들고 싶어지고, 좋은 건물을 보면 좋은 책을 쓰고 싶고,좋은 글을 읽으면 좋은 건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1980 레온 크리어의 “Strada Novissima” 돌아가면, 전시와 건물, 그리고 이론이 함께 실천을 촉구하는 생산적인 상황을 목격할 있다.거리와 도시, 그리고 역사의 회귀를 제안한 지극히 이론적이고 실험적인 전시였지만 가상의 거리에 입면 작업을 제작한 레온 크리어는 훗날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스트라다 노비시마는 건물이었죠겨우 입면도 장을 스케일 1:50 으로 그렸고 투시도와 액소노메트릭 여러 장에 색상 표기를 것이 전부였지만, 작업이 실현된 것을 처음 보았을 무엇인가를 짓는 것에 대한 필요성과 가능성을 결국 느끼게 되었어요.” [1]건물을 타협으로 간주하고 보다 순수한 저항은 전시에서 가능하다고 외치던 젊은 건축가는 결국 전시를 통해 건물의 가능성을 경험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미술관 안에 전시를 기획하는 보다 미술관을 설계하고 싶은 욕망이 크겠다. 그러나 표현의 욕망과 지식의 사유 사이에서 정제되고 사색적인 건축적 사고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1]
“The ‘Strada Novissima’ façade was my first ever building……I merely produced one façade drawing in 1:50 scale plus a number of perspectives and axonometric with color indications…when I saw it for the first time, I felt a need and possibility to build something after all, despite my claiming then that “I do not build (today), because I am an architect, I can do architecture only because I do not build.”Leon Krier, Interview, 17 March 2010, quoted by Lea-Catherine Szacka, Exhibiting the postmodern—the 1980 Venice Architecture Biennale,p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