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건축가

“용감하고 정직한 태도와 건축에 대한 바른 시선”

그들의 작업이 주는 첫 인상은 실험적이라기보다 안정적이고, 신선하다기보다 노련해 보인다. 그들이 수행한 작업들 속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들은 추상적이기보다 구체적이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애매한 뉘앙스보다 명쾌한 해법을 추구하는 듯 하다. 건축에 대한 이념이나 철학적 망상을 버리고 오로지 주어진 조건에 가장 적합한 아이디어들을 조합하여 최대한 수준 높은 건물로 빚어내기 위한 고민과 몸부림이 각 건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젊은 건축가상의 심사위원들은 그들의 “용감하고 정직한 태도와 건축에 대한 바른 시선”을 그들이 선정된 이유로 밝히고 있다. 먼저 그 바른 시선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고찰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건축계가 추구하는 ‘바른 건축’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 그리고 이 글의 부수적인 두 번째 주제는 젊은 건축가의 용기와 정직함이 과연 한국 건축에서 어떤 가치가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오늘날 수많은 재능 넘치는 젊은건축가들이 왜 스스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기성 집단과 젊은 건축가 집단이 이분화 되듯 분리되어 그들만의 상훈제도를 통해 공공의 지원을 필요로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동시대 젊은 건축가들은 아이디어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고상한 개념의 착상을 무작정 기다리거나 미상의 사례를 숨길 수 있는 그럴듯한 인문학적 문헌을 찾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대신 다양한 정보매체의 힘을 빌려 얻어낸 적절한 아이디어들을 한국의 지역적 상황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의 건축설계에 대한 탈신비주의적 태도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며, 허무주의를 벗어나 긍정적이며,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꼿꼿하다. 아이디어에 대한 바른 시선은 건축에 대한 바른 시선으로 이어지고, 그 시선 속에서 표현된 아이디어들은 좋은 건축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제시하는 건축에 대한 태도는 그 형태나 아이디어의 독창성이 아닌 실현 과정의 성실함과 과정 전반에서 목격되는 설계자의 도덕적 책임감, 그리고 그들의 건물로 인한 주변환경의 긍정적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디어의 출처를 확실히 알고 밝히며, 지속되는 형태의 담론에 당당한 주체적 의견을 더하고, 아이디어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도록 현실과 현황에 맞는 적용 방식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노력이 성실한 건축의 생성과정이다. 수 많은 견제와 타협을 거치면서도 묵묵하게 건축적 의도를 조율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능력 안에서 가장 좋은 건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건축가의 도덕적 책임감이다. 그들의 작업들이 바른 건축의 모범적 사례인 이유는 그들의 성실하고 진지한, 바른 태도에서 비롯된 건축이 모두를 위한 바른 사회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많은 젊은 건축가들이 지극히 순수한 도덕적 동기로 인해 어려운 공공 프로젝트들을 불평 없이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모르는 마을에 찾아가 건축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차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그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젊음을 바치는 젊은 건축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젊은 건축가 지원사업의 목적은 “이들에게 각종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원을 통해 건축 및 도시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 프로젝트는 이미 대부분 공개적인 현상 설계를 통해 설계자가 정해져야 하고 건축가의 나이는 참여의 조건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왜 젊은 건축가들에게 별도의 구분된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젊은 건축가들의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의 설계 수준 만으로는 현상 공모에 당선될 수 없다는 의미일까?

한국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현상설계에 대한 심사과정에서 설계자의 수행능력 또는 복잡한 현실화 과정을 버텨낼 수 있는 노련함의 부재여부는 자주 등장하는 고려사항에 속한다. 그러나 설계공모의 취지는 가장 뛰어난 설계안을 뽑는 것이고 모든 참가자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밝힐 수 없기에 그런 유형의 판단근거는 부적합하다. 이 난해한 모순과 위선적인 상황이 바로 젊은 건축가들의 폭넓은 활동을 막고 있는 걸림돌이다. 기성건축가들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반복적으로 인지시키며 그들의 활동 영역에 제한을 두고 있으나 이에 대해 젊은 건축가들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 그들의 용기와 정직한 발언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비이상적인 상황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현재의 부당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들의 능력이 폄하되는 조직적이며 우회적인 수단의 위선적인 면모를 직시하고 이에 대한 솔직한 의견들을 모아야 한다.

20세기 현대건축의 역사는 젊은 건축가들이 주도했다. 특히 전후 고속 성장시대 한국은 청년 건축가들의 무대였다. 김수근(1931-1986)이 국회의사당 공모전(1959)에 당선되어 화려하게 귀국한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고, 그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며 잠시 김수근의 스승이기도 했던 김중업(b.1922) 또한 프랑스대사관(1960)을 설계한 당시 38세의 젊은 건축가였다. 한국건축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 공간사옥(1971)을 김수근은 그가 만 40세 되던 해에 완성했다. 단순히 그 시절에는 훌륭한 인재가 부족하여 젊은 나이의 건축가들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을 비하하는 것이다. 한국에 왜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가 없는가를 묻기 전에 왜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는 큰 프로젝트를 설계할 기회가 더이상 주어지지 않는가를 물어야 한다. 프랑스의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36세의 나이에 프랑스 국립도서관 설계를 맡았고, 요른 웃존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설계를 맡은 것도 그가 38세 되던 해였다. 렌조 피아노(1937-)와 리처드 로저스(1933-)가 퐁피듀 센터 국제 콩쿠르(1971)에 당선된 당시 그들의 나이는 34/38세였다. 그들이 국제 공모전에 당선 되었을 때, 그들이 너무 젊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프로젝트 수행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설계권을 거부하는 편법적인 수작이 있었다면 그들이 오늘날 국제적인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건축은 작가의 경력이 오랜 기간 축적되고 경험이 풍부할 때 비로서 성숙할 수 있다는 편견이 어쩌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젊은 건축가 지원사업과 같은 노력들이 어쩌면 그 의도와 반대로 젊은 건축가에 대한 불공평한 억압과 견제를 지속시키는 교묘한 술책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나이 든 건축가들도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활기찬 창의력을 발휘하며 왕성한 설계작업을 통해 그들의 야먕을 펼쳤던 시기가 20대 후반부터 약 10여년 동안 이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오늘날의 젊은 건축가들은 기성건축가들의 그늘 아래 밤샘을 하며 그들의 청춘을 희생하고 있거나, 독립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착한 건축, 선한 건축을 위하여 겸손하고 소심하게 인내하고 있는지 모른다.